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배다리성냥마을 박물관, 인천 배다리마을

by 이자벨라의 산책 2023. 4. 5.
반응형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 - 전경

성냥산업의 중심, 동인천

인천이 성냥 산업의 중심이었던 사실 알고 계셨나요? 현대에 흔히 사용하는 라이터는 1970년대에 개발되고 보급되었으니 그전에는 라이터 대신 성냥을 사용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2019년 3월에 '인천 민속문화의 해'를 맞이하여 개관한 배다리성냥마을 박물관은 성냥 공장이 많이 있었던 배다리마을의 성냥과 관련한 유물을 아카이빙 해놓은 박물관입니다. 동인천의 배다리마을은 바다 근처이면서 지대가 낮아서 만조 때면 바닷물이 육지까지 넘쳤다고 합니다. 그럴 때면 배와 배를 연결하여 다리처럼 만들어서 통행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배다리마을' 이름의 유래가 시작되었습니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개항장이 있었던 제물포 일대에서 일본 사람들에 추방된 조선사람들이 이 마을에 모여 살았습니다. 지금도 인천 1호선 동인천역에 가보시면 근대 시기에 지은 일본식 가옥과 중국 양식의 가옥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성냥을 모티브로 꾸며진 전경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

배다리성냥마을 박물관이 들어선 건물은 과거에는 '동인천우체국'으로 쓰였던 곳이며 더 과거에는 일본이 세운 '조선인촌주식회사' 건물이었습니다. 조선인촌은 1917년 10월 4일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 공장입니다. 당시 일본은 성냥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인 나무를 압록강 일대에서부터 가져오기 편하고 만들어진 성냥을 경인선 철도를 통해 보급하기 좋다는 이유로 이곳에 공장을 지었다고 합니다. '인촌'이라는 말이 생소한데 이는 '도깨비불'을 의미합니다. 성냥에서 불이 만들어지는 것이 마치 도깨비가 하는 일처럼 보인다 하여 인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냥 이전에는 나무의 마찰을 이용해서 불을 힘들게 얻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마법처럼 한 번에 불을 얻을 수 있는 성냥이 신기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도깨비'에도 배다리마을의 헌책방 거리가 출연한 바 있습니다. 인천의 유일한 헌책방거리인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곳이지만 현재에는 드라마에 출연했던 '한미서점'을 포함하여 다섯 곳만 남아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당시 집집마다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성냥이었습니다. 각 가정에서는 통성냥으로 곤로, 등잔, 난로에 불을 붙일 때 사용했고 개인은 작은 갑 성냥을 들고 다니며 담뱃불을 붙이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만큼 전 국민이 쓰는 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성냥공장은 동인천 일대를 '성냥촌'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부들은 성냥공장에서 빈 성냥갑을 받아다가 풀칠을 하는 부업을 많이 했습니다. 초가집 지붕에는 풀칠한 성냥갑들을 말리는 풍경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세운 최초의 성냥 공장이 한국전쟁 이후 문을 닫고 나서 조선인이 최초로 세운 대한성냥을 시작으로 한양성냥, 고려성냥 등 다수의 성냥공장들이 이 배다리마을을 기점으로 생겨났습니다. 한창 성냥 공장들이 많았을 때는 전국에 3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성냥의 최초 발명은 영국에서 1827년에 있었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1845년에는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탄생했으며 1880년에는 이동인이라는 승려가 우리나라에 성냥을 처음 들여왔다고 합니다.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의 입장료는 무료이며 매주 월요일마다 휴관입니다. 박물관에는 성냥 역사와 제작 과정, 성냥으로 인항 생활 문화 양식과 다양한 성냥 등 2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지상 1층이며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박물관 관람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을 가볍게 둘러보신 뒤, 헌책방골목과 배다리아트스테이 1930, 인천아트플랫폼 등도 둘러보시면 좋습니다.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은 인천광역시 동구청이 기획하고 조성하였으며 '잇다 스페이스'와 함께 협업하여 운영하고 있는 아트 커뮤니티 공간입니다. 과거 여인숙이었던 골목을 예술과 접목시킨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골목의 특징은 건물과 건물이 완전히 붙어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건물이라고 하면 작은 골목으로라도 사이 공간을 두기 마련인데요. 배다리마을과 동인천 도시를 걷다 보면 이러한 양식을 많이 보실 수 있습니다. 과거 유럽에서 건물이 지어진 너비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던 것 때문에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서 지어졌던 것과 비교해 보면 아마도 일제 세력에 의해 쫓겨난 시민들이 좁은 땅 부지에서 삶을 일궈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 양식이 발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배다리 마을로 여행을 떠나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