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은 어떻게 교육열의 메카가 되었나.
대치동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소속이었다가 1963년에 서울시 성동구로 편입되었습니다. 1975년에 서울시 강남구로 편입됩니다. 이전에 강남은 지형이 낮아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에는 홍수가 잦았습니다. 특이 1925년대에 일어났던 '을축년 대홍수' 때는 언주면에 위치한 촌락들이 모두 물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국가 차원에서 탄천과 양재천에 제방을 쌓는 사업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매립지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 자리에 대치동 은마 아파트 단지를 시작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북서울의 인구 포화상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 차원에서 강남 쪽으로 북서울에 있던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강남권으로 이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휘문고', '경기고', '숙명여고', '한영고'등 지금의 '8학군'에 해당하는 고등학교들입니다. 이에 따라 대치동도 평범한 농촌 마을에서 자연스럽게 학구열이 강한 도시로 변화를 시작합니다. 현재 '대치동' 하면 '학원가'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농사만 짓던 곳에서 학원가로 변신
이전에는 잦은 수해로 먹을 것이 부족했던 농촌마을이 갑작스럽게 발전을 하다 보니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에게는 급속한 변화 속에서 적응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학교가 이주하다 보니 주거도 동시에 이주하게 되고 교육 시설 및 교통도 더불어 개발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독서실'이라든지 '고시원', '인쇄소'와 같은 상업 시설도 더불어 발전했습니다. 주민들은 시대의 흐름을 포착하여 자신들의 살 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계속해서 농사를 지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리농사를 짓던 농부가 은마 종합 상가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으로 전향을 꾀해야만 했던 대치동 사람들. 각각의 역할에 맞는 삶의 무게를 견디어야 했을 것입니다.
대치동 학원가를 가보면 마치 공항처럼 캐리어를 끌고 밤늦게 혹은 새벽까지도 이동하는 학생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하루에 3,4시간만 자고 학원가를 전전하며 학업에 매진하는 학생들. 그들에게 삶의 무게는 어떤가요?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낮은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그만큼 학구열이 높다는 반증입니다. 장원급제를 하여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풍습이 이어져 내려온 것일까요? 유독 대학 진학에 목을 매는 형태를 보여왔습니다. 현재는 출생률도 낮고 '대학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으며 대치동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예고되고 있습니다.
서울 곳곳의 이야기를 매년 주목하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매년 서울 곳곳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가는 '서울반세기종합전'을 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대치동을 주제로 2022년 11월 30일부터 2023년 3월 26일까지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종로, 강남, 명동을 조명해왔는데 이번에는 서울역사박물관 개관 2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반세기종합전' 4번째 기획전을 개최한 것입니다. 마지막 전시가 명동 편으로 2012년에 개최했으니 10년 만의 기획 전시입니다. 대한민국의 서울은 특히나 빠른 변화를 겪은 도시입니다. 변화를 기록하고 아카이빙 하여 후대에게 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대치동 기획전을 통해 대치동 뿐 아니라 서울 곳곳의 변화무쌍한 역사를 돌이켜보는 계기로 삼는 것은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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